학사학위

나의 길고 긴 학사 학위가 끝났다. 2012년 에 시작된 학사학위를 2020년을 가득 채워 마친 것이다. 정식으로 학위가 나오는 건 2021년이니 딱 10년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점점 학위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이 다가온다고 생각 하지만, 나에게 이 학사학위는 의미가 깊다. 내가 살면서 처음 정말로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 선택한 방향의 하나의 단기 목표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와 지금은 가려는 방향도, 생각도 달라졌지만 나는 내 학사가 마음에 든다.
내가 처음 적성(적당한 성적)과 부모님의 취향(=취업율)에 맞춰 진학한 곳은 환경공학과였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어나 사회보단 수학이나 과학을 더 좋아했다. 이 과목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간단한데, 원리만 이해하면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성적이 잘 나왔기 때문이다. 반면, 영어나 사회, 국어의 경우 통짜 암기(잘못된 교육의 폐해다)였어서 흔히 말하는 문과 과목의 성적은 언제나 낮게 나왔다. 그래서 나는 평생 이과계열 학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모님도, 나도 이과에 가서 공대에 진학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물론 수학자나 선생님과 같은 직업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굶어 죽고 싶니?" 라거나 "남자가 왜 선생이야?(아버지는 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들에게 긍정적인 기억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라는 멘트로 내 가 갈 수 있는 곳은 자의 아닌 자의로 이공대에서 의대 아니면 공대였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이후 내 성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고등학교 수학의 경우 노력의 양에 비해 성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고등수학부터 본격적으로 외워야 할 공식도 많아지기도 했고 말이다. 반면 언어영역은 거의 언제나 1등급 이었고(물론 언어영역 공부는 거의 안 했다.), 영어 또한 읽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성적이 좋지 않았고, 또 가고 싶은 학과가 심리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철학과였는데 이 모든 학과는 부모님의 친절한 "굶어 죽고 싶니?"라는 멘트로 거절당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 중 "가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선택지(공대)중 가장 하나인 환경공학과 진학했다. 생각 외로 공부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담임교수님의 경우 나를 많이 좋아해 주셔서 1학년부터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권유를 하실 정도였다. 첫 학기에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했다. 문제는 학교 생활에 있었다. 아직까지 이 학교는 특유의 군대 똥 군기가 남아있던 학교였고 나는 입학하자마자 선배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그대로 교수님에게 달려가 학교의 상황을 이야기 한 덕분에 교수님들과는 가깝게 지내지만, 생각 없는 선배들과 이 선배들이 하라는대로 하는 생각없는 동기들을 보며 학교에 대한 정이 떨어져 버린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후 군대에 진학, 그리고 휴학을 지속하다 결국 자퇴한다.
좋은 학위가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학위에 목말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불안에 목이 마른 채 해결책이 학위가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인정과 존중의 결여에서 온 내 삶의 이야기를 학위를 딴 이야기로 대체하려 했다. 물론 좋은 학위도 좋고, 성취의 경험을 지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머리가 아픈데 복통약을 먹고, 다리가 부러졌는데 팔에 깁스를 감는 행위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힘들고 불편할지라도 내 결핍의 원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이해할 때 무엇을 채워 넣을지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내 결핍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채우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공대생으로 시작한 내 학사일정은 10년 만에 심리학 학사라는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비록 심리학 학사를 시작할 때와는 또 다른 마음가짐이 되었지만, 내가 처음부터 모든 부분을 선택하고 감독한 내 삶의 첫 이야기니까. 이제는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