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되돌아본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느껴진다. 2020년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8월부터 일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공부와 독서와 글쓰기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읽은 책은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양이고, 쓴 글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지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지내지 못하고 불안에 너무 많은 자리를 내준 채 시간을 보냈다.
독서토론 모임을 주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이도 같고 관심사도 비슷한 친구에게 “니 삶의 핵심 가치는 뭐야?”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당시 나는 나에 대해 참 잘 안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당연히 이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질문을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무엇이라고 꼬집어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성과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내 삶의 핵심가치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사회의 가치관이 내면에 자리 잡는다. 대한민국의 물신주의에 착실히 적응한 청년답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돈이라고 이야기 했다. 주변에 특별히 먹고사는 걱정이 없을 정도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의 삶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매스컴을 볼 때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최소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적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결핍된 것은 경제력이었다고 생각했고, 이것만 충족시키면 내 삶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휴학하고 일과 사업을 병행하며 참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내가 쓰고 싶은 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그 돈으로 전부터 갖고 싶었던 것들을 사기도 하고, 해보고 싶었던 것들도 거의 다 해보았다. 돈을 쓰는 순간만큼은 일시적일지라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이 너무 피폐해진다고 느꼈다. 돈을 쓰는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들이 돈을 어떻게 더 벌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다. 문득 내가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스트레스에 비해 만족도의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이 많으면 조금 더 편리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더 편리하기 위해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트레스 받기에는 삶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물질적인 것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삶의 부분들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을 하면서도 행복했던 순간들도 돈 때문은 아니었다. 돈이 따라오는 순간이 있었을지언정, 그것이 오롯이 돈이라는 결과물 때문은 아니었다. 또 나를 위해 돈을 사용할 때 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때가 더 즐거웠다. 정작 내가 사고 싶었던 것들은 남들이 하는 것이 부러워서 따라한 것들이었고, 그 만족감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것테지만, 나에게 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타인의 인정을 위한 수단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내가 선택한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 가치관과 의지로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가 진짜 원하는 것을 몰라 그저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많은 경험을 하고 경험속에서 최선을 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경험들에 대한 해석의 기준은 사회가 이야기하는 기준이었다. 정작 진짜 내 생각과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자본주의의 자식이었고,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것들이 개인에게도 가치 있는 것 이라고 교육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연봉이 바뀌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와 같은 급훈들이 교실에 걸려 있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통해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논리에 인간의 감정적 본능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몰랐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사람을 위한 합리와 이상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빠져있다.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것 들은 안 좋은 것이라며, 더 이상적이고 훌륭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피엔스가 가진 유전자가 수십만 년 간 행복을 느껴온 방식은 더 많은 재화를 방구석에 모아두며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런 유전자를 가진 인류가 살아남았고, 수십만 년 동안 전달되었다. 수백, 수천 세대 동안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행복을 즐기던 인류가, 불과 몇 세대 만에 행복을 느끼는 방법이 변할리 없다.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불완전하고 나약한 사피엔스가 선택한 생존법은 ‘공존’이었고,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핵심은 ‘다른 사람’인 것이다. 돈이나 학벌, 사회적 지위 또한 타인으로 구성된 사회로부터 가치가 발생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그저 성공하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만을 해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중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내던저져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타인과 웃고, 울고,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사람은 관계라는 환경 속 경험을 통해 형성되고,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이미 '나'라는 형체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돌이켜 더듬으며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을까. 그 채우고싶은 것을 가치라고 한다면,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있을까. 행복의 다른 이름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살하는 재벌을 보았다. 자신은 평생동안 잘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모은 돈을 모두 기부하는 사람도 보았다. 명예를 차고 넘치도록 가지고 그것이 언제 사라질 지 몰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도 보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채우고 싶은 것이 노랗고 초록색의 옛날 사람들 얼굴이 새겨진 종이나 우리를 잘 모르는 수 많은 사람으로 부터의 선망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의 삶이다. 인생의 가치가 무엇일지 고민해보는 건, 정답은 없겠으나 분명 의미있는 고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