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31. 23:51ㆍ끄적이다

듣고 싶은 수업이 있어 집 근처 대학교에서 청강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업을 듣기 전 날씨가 좋아 캠퍼스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었는데 지나가며 학생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고 있는 과 잠바를 보니 신입생들 같아 보였다.
“저 선배 27살이라고? 27살이면 화석 아냐? 아직도 졸업 안 한 거야?”
그 당시 내 나이가 27살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왠지 그 말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 네가 그 나이에 뭘 알아, 그냥 선배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저 말을 했던 선배와 신입생들의 나이 차이는 얼추 10살 정도 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저 나이에 집착하는 관습은 여전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몇 년 후 저 신입생은 나중에 자기보다 어린 후배들에게 꼰대 소리를 듣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리다고, 많으면 꼰대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일이 참 많은 우리나라이다.
한국 사회는 나이가 참 중요하다. 20대에는 좋은 학력과 스펙을, 30대에는 좋은 직장을, 40대에는 좋은 집과 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마치 삶의 공식과도 같다. 그리고 이런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온다. 반대로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며 싫어한다. 그렇기에 항상 무언가를 하는 데 있어서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이런 선택을 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나이를 숫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단순히 생물학적 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살아온 시간만으로는 표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의 중첩이 아닌 시간 속의 사건들의 중첩이 아닐까. 같은 20살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으며 자란 20살과 무인도에서 혼자 자란 20살은 다른 20살 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1970년의 15살과 2019년의 15살의 차이는 같은 해에 미국에서 자란 15살 청소년보다 더 심할 것이다. 나보다 10살 어린 사람이, 10년 전 나의 오늘을 살아가지 않는다. 누군가는 20대에 경험한 것을 누군가는 30대에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40대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같이’ 경험할 수는 있어도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매일 봐 오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경험이 될 테고, 이런 경험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사회가 급변할수록 같은 나이의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의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가치관과 생각이 천차만별이다. 옛날처럼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에게 살아온 시간은 조금 더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오늘이 자식의 내일과 같은 사회처럼, 다른 것이 오직 ‘살아온 기간’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빨리 변함에 따라 나이의 의미는 점점 줄어드는게 아닐까. 숫자는 나이의 일부 일뿐 전부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같은 기간을 산다고 해도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나오는 “무언가를 하기에 너무 늦거나, 이른 나이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 30대에 다시 대학에 갈 수도, 40대에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도 있다.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것은 20대 만의 특권이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40대 만의 특권이 아닌 것이다. 가치를 느끼는 것에 도전하고 살아가며 순간순간이 즐겁다면 그것이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아닐까. 가치를 느끼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게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