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7)
-
버리다.
나는 옛날부터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오래 사용하지 않는 물건도 왜인지 버리지 못했다. 물건에 정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든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 그중에서 특히 대입 공부와 관련된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수험생활이 끝난 지 8년이 넘어가던 해까지 집에는 아직도 수학의 정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학력에 대한 미련이 컸다. 장남으로써 부모님이 저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많이 했었다. 사람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더더욱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보통 자식들은 누구보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나에게 공부와 관련된 것들은 그런 내 욕구와 미련이 가장 많이 담겨있는 물건들이라 더욱더 버리지 못했다. 작..
2020.12.30 -
고갈되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너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였다. 표면적 메시지만 보면 굉장히 힘이 되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내가 무언가가 하고 싶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왜 그 직업이 하고 싶은지(표면적으론 질문이지만 뉘앙스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묻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다른 것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혹은 어떠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하면 그 직업으로는 먹고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괜찮으니 노력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종국에 내 꿈을 바꾸었다. “재벌 2세” 혹은 “회장님 아들” 같은 것들로 말이다. 그리고 부모님 때문에 내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더 노력하라고 촉구했다. 정말 날..
2020.12.29 -
여행
나는 3년 전부터 매년 심리 상담을 받았다. 나 스스로가 어떠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로 생각 한 이후 그것을 위한 노력 중 한 가지였다. 매년 8회씩 3번째 받고 있어 우스갯소리로 프로상담러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상담 받는 거 어떤 기분이에요?”주변에 나처럼 자기탐색에 관심이 많은 분이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상담을 받는 기분을 묻는 질문은 처음 이었기에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나의 과거로 여행을 가는 기분이에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요.” 상담을 받는다는 것은 상담사님과 함께 나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말이다. 그래서 더욱 다각도로 내 감정을 인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번에..
2020.12.29 -
집단적 독백
심리학에 '집단적 독백'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집단적 독백은 자기중심적 언어의 일종으로, 상대방의 질문이나 반응에 관계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주로 유아기에 나타난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집단적 독백은 성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집 앞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어느 봄날 이었다. 옆 테이블에 중년 부부가 들어와 앉았다. 옷을 꽤나 차려입은 부부였다. 이 부부가 앉은 테이블이 내 테이블과 가까워 둘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만의 대화방식 일지도 모르지만, 둘의 대화하는 것이 어색해 보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서로 하고싶은 이야기만 하는 듯했다. 남편으로 보이는 분은 회사 이야기를 부인으로 보이는 분..
2020.12.28 -
아름다워야 하지 않아 아름답다
“아름다워 지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적어도 나에게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나에게 꽃은, 그 명제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너도 그래.” 친구가 그림을 직접 그려 선물해 주며 나에게 해 준 말이다. 이날 친구와 술을 마시며 내 삶을 통틀어 가장 많이 울고, 가장 많이 웃고, 가장 많이 취했다. 눈물을 흘린 만큼 가벼워졌고, 웃은 만큼 나다워졌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고 너무 감사했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삶의 모든 순간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나는 이날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나의 한 꺼풀이 죽었다. 한 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한 내 모습이. 그 안에는 그저 나..
2020.12.27 -
받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그렇기에 관계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다울 수 있었던 사람들을 어린 시절 너무 많이 잃어 보았다. 점점 더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미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잃을 때 마다 더 혼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사라질 때 마다 조금씩 나를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자립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것 같다. 내 삶을 홀로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외로움이란 감정을 부인하고 능력에 집착했다. 이런 감정이나 생각들을 전부 인정하면 내가 너무 못나고 나약한 것 같았으니까. ⠀⠀⠀ 관계의 소실에서 오는 외로움과 고통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소중한 사람은 잃으면 너무 아프니까,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관계 속에서..
2020.12.26